
순례의 길
0. Prologue
달빛이 숨 죽여 흐느끼는 밤, 세 사람은 선착장에 모였다. 눈빛은 차고 단단했다.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을 품은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중 한 사람은 오래 전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시력을 상실했는데도 그러했다. 한때 절망이 번져 흐리멍덩했던 그의 눈빛은 이제 선명한 의지가 깃든 태양처럼 타올랐다. 비록 그 자신은 제 얼굴조차 거울에 비춰 볼 수 없게 되었으나, 이를 마주한 두 사람은 적잖게 놀랐다. 굵고 가는 주름 가득한 노은의 얼굴 위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닮은 구석 하나 없는 얼굴인데도, 같은 뜻을 품었기 때문일까, 오늘만큼은 그가 먼저 스러진 제 벗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놀란 기색을 먼저 갈무리한 것은 나우플리온이었다. 그는 양옆에 선 두 사람을 보며 은밀히 미소 지었다. 실패할 리 없는 동지를 얻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비록 지금 달빛을 피해 아무 환대도 바랄 수 없는 밀항을 준비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반드시 성공하리라.
그는 평생을 무모하게 살았으나, 아끼는 사람의 목숨을 담보 삼아 만용을 부릴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천 길 낭떠러지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불안하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를 압도하는 신뢰가 발끝까지 차올랐다. 그렇다. 그는 믿었다. 비록 자신은 어리석으나 저 나무탑의 현자는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갖췄다. 자신은 낡고 닳았지만 여행이라는 고독길에 오를 이는 새롭고 고귀했다.
있는 힘껏 그들을 지키리라. 그의 소년이 전한 붉은 심장은 필시 이 천명을 따르기 위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 녀석은 옛날부터 감이 좋았다. 마침내 나우플리온이 입을 열었다.
“출항이다.”
제로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몸조심해라, 이솔렛.”
“네.”
대리석처럼 단단한 목소리가 답했다. 심성처럼 강직한 음성이었다. 많은 말이 오갈 여유가 없었기에 인사는 간결하게 끝났다. 이솔렛은 날렵한 동작으로 작은 돛배에 올랐다. 클로버가 수놓인 작은 주머니를 열어 손을 뻗으려는데, 갑자기 제로가 불쑥 손을 뻗었다. 예상치 못한 노인의 행동에 당황한 이솔렛이 나우플리온을 쳐다봤다. 잡아 봐. 제로를 만류하는 대신 나우플리온은 입 모양으로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결국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잡자 제로가 힘을 주어 흰 손을 맞잡았다.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짧은 말이었지만 이솔렛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제로는 과연 일리오스 사제의 친구였다. 이 자리에 없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사내, 만일 그가 있었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었을 말이 제로의 입을 빌려 공기 중에 내려앉았다. 이솔렛은 천천히 발음했다.
“유념할게요.”
나우플리온은 자기도 그 말을 하고 싶었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이솔렛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하는 마음과 걱정을 덜어 주려는 마음 모두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반드시 보답하겠노라 다짐하며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돛배를 중심으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욱하게 주변을 둘러쌌다. 배 하나쯤은 감추고도 남을 만큼 짙은 안개였다. 섬 안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제 중에서도 단 한 사람뿐었다. 이솔렛은 아직도 그분이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조금 얼떨떨했다.
나우플리온이 처음 부탁을 하러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 온화한 성정의 데스포이나는 평정심을 잃고 물건을 집어던질 만큼 화를 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일평생을 섬을 수호하는 데 바친 늙은 사제로서는 차라리 천지가 개벽하는 쪽이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우플리온은 결국 데스포이나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지팡이의 사제는 여전히 그들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덧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인 나우플리온을 아직까지도 귀여워하며 동생처럼 여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그는 당장 고발해 마땅한 비밀을 눈감아 줬으며, 심지어 이렇듯 자신의 힘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였다. 아버지였다면, 이솔렛이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였다면 능력 부족 따위를 이유로 진 빚을 모른 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아버지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이솔렛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 계획을 성공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 대륙에 나가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1. 돌아온 손님
사람이 사는 마을 중 케이레스 사막, 통칭 필멸의 땅과 가장 가까운 율드루이는 조용한 것에 비해 유동 인구가 많은 축에 속했다. 정신 나간 보물 사냥꾼, 정신 나간 마법사, 정신 나간 탐험가에 정신 나간 유령까지, 아무튼 정신이 나가 있다는 공통점 말고는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심심찮게 몰려들어 마을 주민 전원을 먹여 살리는 희한한 산업 구조를 가진 마을이기도 했다. 유령이야 매출에 하등 도움이 안 될뿐더러 멀쩡한 손님까지 반미치광이로 만든다는 점에서 영 꺼림칙하고 달갑지 않은 방문객이었지만, 나머지 정신 나간 무리들은 밖에서 보는 시선이야 어떻든 간에 이곳 사람들에게만큼은 몹시 감사하고도 귀한 존재였다.
그 귀하신 분들 중 절반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큰 돈 주고 산 장비를 환불해 달라며 야단법석을 떠는 진상으로 진화했고, 나머지 반 중 또 절반은 실종되거나 유령에게 몸을 빼앗겼다는 흉흉한 소문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한 줌만 남은 이들이야말로 고객 중의 고객으로 거듭나 융숭한 대접을…… 받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에 뒤집어쓴 덤터기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값 주고 장비를 살 자격 정도는 얻을 수 있었다. 두 번 방문하는 사람들이 원체 적은 만큼 마을 사람들은 재방문자의 얼굴을 귀신같이 기억했다.
교회당 여관 주인의 의동생인 애꾸눈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이름은 페르디난트였는데, 얼굴이나 하는 짓과는 영 딴판으로 우아한 이름 때문에 비웃음을 된통 사서 그 자신 역시 제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름보다는 신체적 특징을 따 애꾸눈으로 더 자주 불리는 사내는 한쪽만 남은 눈을 크게 떠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망연히 쳐다봤다. 율드루이 상인들의 신통한 기억력을 알 리 없는 보리스 입장에서는 그 노골적인 시선이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애꾸눈의 이상한 행동은 시선에서 멈추지 않았다.
“혀, 형님! 형님! 나와 보시오!”
그는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여관 주인을 불렀다. 저녁 장사를 위해 주방에서 술을 데우던 주인이 웬 소란이냐며 짜증스럽게 나오다 말고 보리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자 역시 턱이 빠질 것처럼 놀라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상스레 여긴 이솔렛이 보리스의 옆구리를 쿡 찌를 만큼 유별한 반응이었다.
“난동이라도 부렸어?”
“제가 그분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넌 그분의 하나뿐인 애제자잖아. 제자는 스승을 닮는 법이거든.”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제가 당신의 하나뿐인 애제자였던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보리스가 제법 능숙하게 받아치자 이솔렛이 어이가 없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남들의 놀란 기색은 안중에도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결국 여관 주인인 로크모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 당신, 살아 있었나? 설마 유령은 아니겠지?”
멀쩡한 사람을 유령으로 모는 게 어이없어 이번에는 보리스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여관 주인과 애꾸눈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화들짝 놀라는 게 정말로 무서워하는 기색이라 결국 이솔렛이 대신 대답했다.
“사람이에요.”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이솔렛은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보리스는 심상치 않은 사람들의 반응에 조금 머뭇거렸지만, 안에서 이솔렛이 손짓하자 곧 곁으로 다가가 짐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애꾸눈 사내가 힉, 하고 놀란 소리를 냈지만 로크모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율드루이의 장사꾼답게 놀란 모습을 재빨리 감추고 보리스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군? 금세 돌아갔나 보지? 현명한 판단이야.”
“저를 기억하십니까?”
의아해진 보리스가 물었다. 저야 율드루이에서 머문 곳이 하나밖에 없으니 기억하고 다시 찾아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만, 이자들에게 있어 자신은 하룻밤 머물고 사라진 손님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로크모드는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다뿐이겠나? 아무리 이 근방에 미친 작자들이 많이 몰려도 말이지, 제 목숨은 다 아까운 법이거든? 자네처럼 황무지 정중앙을 가겠다며 나서는 사람이 어디 흔해야 말이지.”
드디어 수수께끼가 풀린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로크모드를 보며 귀신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마음을 추스른 애꾸눈 사내도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그 장비는 어쨌나? 여기가 아니면 값을 쳐 주는 곳도 별로 없을 텐데.”
“썼죠.”
그 밖에 달리 무엇을 했겠냐는 듯 보리스가 말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무용담을 과장해서 늘어놓으며 으스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럿 봤지만, 이토록 담담한 어투로 엄청난 말을 하는 사람은 보리스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반응에 당황한 여관 주인과 애꾸눈 사내가 서로를 멍청하게 바라봤다.
“그, 그러니까 정말 황무지를 건넜다는 건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수? 다 허풍일 거요, 형님.”
면전에 대고 쑥덕거리는데도 보리스와 이솔렛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들끼리 귓속말로 무어라 속닥거리더니 저녁을 시키고 아무 테이블이나 골라 앉을 뿐이었다. 김이 빠진 애꾸눈 사내가 주방으로 들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로크모드는 유심히 두 사람을 살폈다.
황무지를 건넜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참으로 믿기 힘든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스의 말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로크모드는 위험천만한 율드루이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자였다. 동물처럼 직감이 발달한 사내였고, 제 판단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필멸의 땅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율드루이 사람들은 대륙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이 사실을 뼈저리게 알았다. 그런데도 보리스의 말을 믿는 쪽으로 자꾸 생각이 기울었다. 저 남자는…… 필멸의 땅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떨어져도 기어이 살아남고야 말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마치 불멸할 것처럼.
에이, 이게 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로크모드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쳤다. 아무렴 어떤가. 보리스가 정말 황무지를 건넜든 중간에 줄행랑을 쳤든 그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그가 다시 손님으로 여관을 방문했다는 사실, 즉 로크모드의 훌륭한 수입원이 되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로크모드는 이솔렛과 보리스에게 다가가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넸다.
2. 금발과 은발
달이 기울자 여관 손님들은 하나둘 취해 갔다. 술은 두려움을 잊는 데 그만이었다. 처음 온 사람들은 물론, 십수 년째 황무지를 들락거리는 전문 보물 사냥꾼들도 이 시간이 되면 술을 찾았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과 창밖으로 보이는 기묘한 식생도 기분 나빴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내일 필멸의 땅을 제 발로 입성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 안에서 멀쩡한 사람이라고는 오직 이솔렛과 보리스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얼굴을 마주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사람, 굴러다니는 술병을 밟고 우당탕탕 넘어지는 사람, 그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웃어 대는 사람 등 정신없는 틈바구니에 낀 두 사람의 모습은 몹시 이질적이었다. 그때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로크모드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장난이 반짝 스쳤다. 그는 짓궂은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그때랑 옆에 있는 여자가 다른데?”
먼저 로크모드를 쳐다본 건 이솔렛이었다. 보리스는 생뚱맞기 짝이 없는 저 말이 자신을 겨냥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이솔렛의 고개가 돌아가고 난 다음에야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이솔렛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로크모드가 불쾌하리만치 싱글거리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여자가 바뀌었다고, 당신.”
영문 모를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말뜻을 파악하던 보리스는 곧 상대방이 나야트레이를 가리켜 한 말임을 깨닫고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애초에 나야트레이를 만난 것도 여기 오고 난 다음이다, 우연히 목적지가 같아 동행한 것뿐이다,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등 따질 말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크모드의 혀가 더 빨랐다.
“그때는 은발, 이번에는 금발? 대단하군. 역시 얼굴이 반반한 자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이지.”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황당한 말이었다. 유들유들한 말과 표정 속에는 놀릴 생각이 다분해 보였다. 시답잖은 장난질을 걸려고 작정한 상대를 진지하게 임해 봤자 웃음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차라리 상대를 말자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뜻밖에도 이솔렛이 재미있다는 듯 싱긋 웃었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그때도 여자랑 같이 있었어요?”
“아니, 이솔렛,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오, 그랬지. 어디 보자, 그때는 아가씨보다 더 어렸어. 그리고 피부가 거무끄름했지. 아, 그 여자도 검을 잘 썼어. 상당한 실력자더군.”
“어떤 검술을 썼나요?”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빠르던걸. 모르긴 해도 일반적으로 대륙에서 통용되는 기술은 아닐 거야, 아마.”
“그래서 보리스랑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아니, 저기…….”
“글쎄다, 둘 다 입이 무거워서 말이야. 뭐라 쑥덕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솔직히 잘 안 들리더군.”
두 사람은 의외로 말이 잘 통했다. 로크모드야 그렇다 쳐도 이솔렛이 이렇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보리스를 소외시키고 대화를 나눴다. 주로 이솔렛이 묻고 로크모드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처음에는 황당해서 지켜보던 보리스도 나중에는 포기하고 애꿎은 물만 술처럼 홀짝거렸다. 그렇게 과거 교회당 여관을 들렀던 이야기가 이어지던 중, 이솔렛이 눈매를 곱게 접으며 문득 기억났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그, 나야트레이라고 하는 사람이랑 저, 둘 중 누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생각도 못 했던 질문에 허를 찔린 두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이솔렛을 쳐다봤지만, 정작 폭탄을 던진 이솔렛은 자기가 뭐 이상한 소리를 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리스는 입가가 자꾸 올라가는 것을 감추지 못해 아예 손으로 가렸고, 이솔렛은 그저 따뜻한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로크모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 방 먹었어. 아, 정말 훌륭한 아가씨야. 그래, 남자한테 좀 과분하긴 해도 분명 당신이 더 잘 어울려.”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보리스는 이 순간, 로크모드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로크모드가 당황스러워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자각하진 못했지만 지금 그는 다섯 살 이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조금 부담스러워진 로크모드가 밀린 일을 핑계 삼아 쌩하니 가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발의 이솔렛은 웃음을 참으려 무진 애를 쓰며 귀여운 연인의 얼굴을 즐겁게 감상했다.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3. 방과 돈의 상관관계
“방은 몇 개 줄까?”
“……네?”
날벼락이 떨어졌다. 여관에 온 이상 당연한 절차였지만, 이솔렛을 만난 후 내내 설렘과 반가움으로 가득 차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보리스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운 난관이자 자극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떨림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플 만큼 두근거렸다. 쿵쾅대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솔렛과 방을 같이 쓰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섬을 있을 무렵에도 실버스컬 때문에 단둘이 대륙을 여행하는 동안 많은 밤을 함께 보냈고, 섬을 나오고 난 후에도 기회를 틈타 몇 번을 만났다. 심지어 몸을 섞은 적도 있었다. 사실 많았다. 그토록 숱한 밤을 함께 보내고도 이솔렛 앞에만 서면 영락없이 쑥맥이 돼 버리는 제 자신이 스스로도 답답했다.
한 개만 잡아도 될까.
이솔렛도 같이 자고 싶을까.
금방 나올 줄 알았던 대답이 지연되자 로크모드가 의아한 눈빛으로 보리스를 쳐다봤다. 마음이 급해진 보리스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방. 방은, 그러니까…… 어떻게 할까요, 이솔렛?”
그리고 참사가 벌어졌다. 목소리가 볼품없이 음을 이탈하고 만 것이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부터 불안정하게 떨리던 목소리가 ‘어떻게’를 말할 때 궤도를 잃고 속절없이 흔들렸다. 쥐구멍, 쥐구멍이 어디 있더라……. 건물을 받치고 있는 저기 저 돌기둥이 참 튼튼해 보이는데, 저런 곳에 머리를 대여섯 번쯤 부딪치면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까? 창피함에 별의별 생각이 범람했지만 보리스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연출했다.
한편 로크모드는 그대로 자세를 무너뜨리고 흐느끼듯 웃음을 토해 낼 뻔했지만, 베테랑 여관 주인답게 손님을 무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장인 정신을 발휘하여 후들거리는 상체를 억지로 지탱했다. 참으로 훌륭한 여관 주인이었다. 웃음을 참기 위해 그는 제 허벅지를 필사적으로 꼬집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솔렛은.
“어떻게라니?”
놀랍게도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로 평온하게 물었다.
“그, 방을, 몇 개…… 큼, 잡아야 할지…….”
보리스가 다시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솔렛을 따라 아무렇지 않은 체하고 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든 지 오래였다. 로크모드는 오랜만에 발견한 재미있는 구경감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네?”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한 보리스가 아예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쳐다봤다. 자기가 생각해도 무척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이보다 나은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솔렛은 여전히 표정에 아무 미동도 없었다. 보리스가 계속 우물쭈물하는 사이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관전하던 로크모드가 결국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아, 거참, 정말 숫기 없는 청년이군.”
“그렇죠?”
“쯧, 아무리 봐도 아가씨가 아깝단 말이야.”
저를 놀리는 말인 줄 알면서도 보리스는 솔직히 공감했다. 이솔렛은 제게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 연인이라는 게, 저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는 게 가장 믿기지 않는 사람도 사실 보리스였다. 장난기 가득한 상황 속에서 난데없이 벅차오르는 자신이 참 어지간하다 싶었지만, 상대가 이솔렛이라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보리스가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 있는 사이, 이솔렛이 다시 한 번 폭탄을 던졌다.
“방은 하나만 주세요.”
“그렇지! 자네도 배우란 말이야.”
이제 로크모드는 아예 팔짱까지 끼고 숫제 잔소리를 해댔다.
“네? 아, 그, 그렇죠. 방을 같이 쓰는 게 경제적이기도 하고, 다음 날 준비하는 시간도 단축되고, 그 밖에도 여러 이점이 있을 테니까…….”
……그는 제발 누가 제 입을 막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말을 하지나 말지,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는 걸까. 도대체 이솔렛 눈에는 얼마나 바보처럼 보일까. 결국 실실 웃던 로크모드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됐네, 이 사람아. 자네,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영 쑥맥이군?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 준 답례로 방은 조금 더 좋은 걸 주지.”
이 상황에서 보리스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이솔렛도 뒤이어 간단한 목례와 함께 인사했다. 로크모드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전에 왔던 아가씨보다 잘 어울려서 주는 서비스야.”
“……이제 그만하시죠.”
“하하, 알았네! 가격은 은화 여섯 개만 주면 돼.”
“열쇠는 어떻게 반납하면 되나요?”
“나나 저 녀석, 아니면 카운터에 두고 가도 되지.”
“알았어요.”
보리스가 얼굴을 식히는 사이 모든 게 매끄럽게 해결됐다. 열쇠를 건네받은 이솔렛이 앞장섰다. 이솔렛은 왜 방을 하나만 잡았을까. 오직 그런 의문만이 보리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놨다. 마음속에 어떤 선명한 기대가 차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솔렛의 뒤를 따르는데, 삐걱거리던 계단을 앞서 올라가던 이솔렛이 갑자기 뒤로 돌았다. 제 음흉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흠칫 놀란 보리스가 잘게 몸을 떨었다.
“이솔렛?”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바보 같았다. 이솔렛의 귀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려야 할 텐데. 초조한 마음으로 이솔렛을 응시하는데, 이솔렛이 몸을 숙여 보리스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여비는 충분해.”
“네?”
“준비하는 시간도 나는 원래 별로 안 걸려.”
갑작스러운 말에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솔렛은 더 설명해 줄 마음이 없는지 그대로 다시 뒤돌아 계단 위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짧게 친 머리카락 탓에 선명하게 보이는 하얀 목이 평소보다 조금 붉은 것도 같았다. 망연히 서 있던 보리스에게 갑자기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에 급격히 피가 몰리는 듯했다.
‘네? 아, 그, 그렇죠. 방을 같이 쓰는 게 경제적이기도 하고, 다음 날 준비하는 시간도 단축되고, 그 밖에도 여러 이점이 있을 테니까…….’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을 들어 가리며 보리스는 거의 계단에 주저앉다시피 했다.
“아, 정말, 이솔렛…….”
그런 말은 반칙이잖아요.
4. 생략된 밤
5. 비범한 두 사람의 평범한 아침 식사
이른 아침부터 여관 곳곳을 청소하던 여관 주인은 낡은 계단이 삐걱거리자 목을 길게 빼고 위를 살폈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보리스와 이솔렛이었다. 남자는 어제처럼 단정한 얼굴이었고, 여자는 아직 졸린 듯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했다. 두 사람은 부엌 앞 의자에서 졸고 있는 애꾸눈을 깨워 간단한 아침 식사를 부탁한 다음 어느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윽고 따끈하지만 밍밍한 수프, 딱딱한 빵, 시큼한 낙타젖과 허브에 재워서 구운 닭가슴살 따위가 차례대로 나왔다. 로크모드조차 빈말로도 맛있다고 할 수 없는 식사였지만, 두 사람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음식을 잘라 꼭꼭 씹어 먹었다. 보기 드물게 조용하고 점잖은 손님이었다. 둘 모두 검깨나 써 본 태가 났지만, 거친 용병들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로크모드는 문득 호기심이 일어 의자를 정리하는 척 두 사람 근처로 다가갔다. 그때 짧은 금발의 입가에 뭐가 묻기라도 한 듯 군청색 장발의 남자가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에 갖다 대는 것이 보였다. 필멸의 땅 부근에서 먹고산 지 벌써 수십 해가 흘렀지만, 이런 낯간지러운 짓은 처음 본 로크모드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보리스였다. 잠에서 갓 깬 이솔렛은 새파랗게 날이 선 평소와 달리 조금 무른 구석이 있다. 실버스컬 때문에 함께 여행하면서 알게 된 모습이었다. 그래서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무심코 떼어 준 보리스가 아차 싶어 쳐다보는데, 뜻밖에도 이솔렛은 별말 없이 배시시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귀여운 모습에 보리스가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전부 봐 버린 로크모드는 눈꼴시어 가볍게 혀를 찼다.
황무지 정중앙을 횡단하겠다며 나섰던 소년이 훤칠하게 자란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로크모드는 내심 저자가 유령보다 무섭다고 생각했다. 잔뼈 굵은 상인답게 돈줄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언행은 삼갔지만, 솔직히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사내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이솔렛도 마찬가지였다. 길고 품이 넉넉한 옷을 입은 탓에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오랫동안 용병들을 보고 자란 로크모드는 자세가 꼿꼿한 아가씨의 몸이 상당한 근육질이라는 사실도 진작에 눈치챘다. 등 뒤로 질끈 동여맨 쌍검만 해도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비범한 두 사람이 지금은 여느 연인 못지않게 평범해 보였다. 반나절도 안 되는 거리에 필멸의 땅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양 평화로운 모습에 로크모드는 기가 찼다. 괜히 못된 농담을 지분거리고 싶어진 로크모드가 테이블을 닦던 행주를 내려놓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자네들은 여기가 데이트 장소인 줄 아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그들이 식사를 멈추고 여관 주인을 쳐다봤다. 그런데 남자의 표정이 조금 오묘했다.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어째 들뜬 사람의 모습이라 로크모드는 뒷목을 잡고 싶어졌다.
“이봐, 자네 말이야. 칭찬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좋은가?”
좋았다.
정말 좋았다. 형편없는 아침상과 낯설기만 한 낙타젖은 물론, 어깨를 짓누르던 두려움과 의무감마저 단번에 사라질 만큼 행복했다. 데이트. 얼마나 낯선 단어인가. 발음해 본 적조차 없는 말이었다. 그토록 풋풋하고 달콤한 일은 언감생심으로 여겼는데, 여관 주인의 핀잔을 듣고 나니 과연 지금 이 순간이 새삼스럽게 데이트인 것만 같아 마음이 부풀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던 보리스는 곧 한심하게 쳐다보는 여관 주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뜨끔한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릇에 담긴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의외로 대꾸는 맞은편에서 들렸다.
“아니야?”
나는 좋은데. 대리석처럼 단단한 목소리가 딱 잘라 말했다. 불쌍하게도 보리스는 단단히 사레들려 안타까울 만큼 콜록거렸다. 보다 못한 로드모크가 더 놀릴 생각도 못 하고 등을 두드려 줄 정도였지만, 이솔렛은 턱을 괴고 보리스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가씨는 어제부터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지. 정말 보통이 아니군그래.”
감탄과 탄식이 반반 서린 말에 이솔렛은 그저 생긋 웃어 보이고는 보리스를 쳐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보리스, 정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있는 시간은 전부 소중하다고요!”
거듭 묻는 이솔렛에게 보리스가 시뻘건 얼굴로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교회당 내부가 울릴 정도였다. 곧 자기가 저지른 짓을 깨달은 보리스가 헙, 하고 제 입을 막았다. 로크모드는 괴상망측한 얼굴이 되어 보리스를 쳐다보았고, 이솔렛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은 사이 식사를 마친 이솔렛이 키들거리며 보리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보리스가 고개를 숙인 다음 제 머리를 갖다 댔다. 이솔렛은 익숙한 손길로 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른 밥 먹어. 놀려서 미안해.”
“정말, 당신은……. 나날이 장난이 느는군요.”
“그래서 싫어?”
“아, 제발. 그만해요, 이솔렛.”
보리스가 흡사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졸지에 투명 인간으로 전락한 로크모드는 뭐 씹은 표정이 되어 저만치 구석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러 갔다. 언뜻 들리기로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지만, 둘만의 세게에 빠진 연인들의 귀에 닿을 턱이 만무했다.
6. 단골 할인
식사 후 나갈 채비를 마친 두 사람이 다시 내려왔을 무렵에는 보리스와 로크모드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실은 평소보다 엄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는 ‘아침 식사 때 있었던 일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 것’이라는, 암묵적인 협약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운터에 선 로크모드가 물었다.
“지도를 볼 텐가?”
“그러죠.”
보리스가 주머니 안쪽에서 은화를 꺼냈다. 반들반들한 은화 한 개를 건네받은 로크모드는 애꾸눈을 불러 지도를 가져오게 했다. 애꾸눈이 낡은 지도를 펼치자 보리스가 대강 눈으로 훑은 다음 이솔렛에게 건넸다. 이솔렛은 지도 가장자리에 빼곡하게 적힌 황무지의 지리적 특성을 손으로 짚어 가며 열심히 읽었다. 행선지를 물으려고 하는 찰나, 보리스가 가방에서 자루를 꺼내 돈을 올려놓았다.
“허, 참.”
시드 은화 열 개와 오십 티보 금화 두 개, 그리고 동전 몇 개. 보리스가 치른 값의 의미를 알아차린 로크모드는 말문이 막혀 돈과 보리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처음 보리스가 왔을 때 지불했던 금액의 정확히 두 배였다. 하지만 돈을 낸 당사자는 표정에 미동 하나 없이 제가 받을 물건을 조용히 기다렸다. 혹시 옆에 있는 여자가 말려 줄까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그자 역시 무심한 표정으로 제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가늠하는 듯 지도를 유심히 살필 따름이었다. 결국 괜한 참견을 부리는 대신 로크모드는 몸을 돌려 부엌 옆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와 같은 짐을 두 사람 몫만큼 가지고 와 보리스와 이솔렛에게 건넸다. 자루를 받은 두 사람은 들기 쉽게 짐을 정리하고 간단한 목례와 함께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대로 나가려고 하는 보리스를 로크모드가 불러 세웠다.
“이봐.”
뒤를 돌아보는 보리스에게 로크모드가 은화 열 개를 퉁기듯 던졌다. 얼떨결에도 민첩한 반사 신경으로 은화를 모두 받아 낸 보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크모드가 피식 싱겁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가 이내 짧게 말했다.
“사실 그게 제값이야. 단골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지.”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보리스와 이솔렛은 가타부타 말을 얹는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단단한 자루 속에 은화를 집어넣었다. 동전들이 부딪히며 쨍그랑하는 소리를 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갔고, 로크모드도 쓸데없는 배웅을 하는 대신 자리에 앉아 금화를 정리했다.
7. 고귀한 고독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장비를 계산하고 나올 때부터 말없이 걷기만 하던 보리스가 우뚝 멈추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이솔렛은 ‘뭐가?’라고 묻는 대신 뒤돌아서서 가만히 그가 말할 시간을 줬다. 보리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지만 조금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당신을 이곳에 데려온 게 정말 잘한 일일까요?”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솔렛은 냉정하다 싶을 만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데려온 건 나야.”
“물론 그렇지만…….”
보리스 역시 이솔렛의 반응을 예상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래도 역시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고개를 떨궜다.
“내가 네 보호 없이는 몸도 지킬 수 없을 만큼 약해 보여?”
이솔렛의 말에 보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오히려 내가 당신 보호 없이 몸을 지킬 수 있을지 걱정인데요.”
“그렇다면 그런 고민도 할 필요 없어. 나는 내 의지에 따라 이곳에 왔고, 네 도움이 필요해 손을 뻗었어. 내 의사를 존중한다면 더는 걱정도 하지 말아 줘.”
“알았어요, 이솔렛.”
보리스의 장점은 이럴 때 불필요한 첨언 대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점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솔렛의 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했다. 짧은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묵묵히 걸었다. 이솔렛이라고 해서 보리스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역시 보리스와 똑같은 걱정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이미 섬을 떠난 보리스에게 섬의 문제가 과연 중요할까? 분명 보리스는 소중한 몇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섬의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못할 만큼 다정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들에게 보리스의 도움은 실로 절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감정적인 문제를 차치할 경우 실상 보리스는 섬과 무관했다. 오히려 섬이 그에게 저지른 폭력을 생각하면 무리한 부탁을 요구하는 건 이솔렛이었다. 보리스는 몇 년 전 나야트레이라고 하는 소녀와 함께 무사히 필멸의 땅을 건넜지만,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행운이 따랐다. 이번에도 같은 행운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을 바꿀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이 땅에만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 중 이곳을 가장 잘 아는 사람, 가나폴리와 섬의 관계를 아는 사람, 동시에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보리스 하나밖에 없었다.
너뿐이야.
이솔렛은 가만히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 척추를 타고 전신을 휘감는 이 감정은 분명 두려움이었다. 필멸의 땅. 본 지명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 이명은 결코 과장된 비유가 아니었다.
그곳에 들어간 자는 필히 죽는다. 어쩌면 보리스만이 무시무시하게 벌려진 입을 통과하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온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야만 했으며, 동시에 믿을 만한 자였다. 의무, 신뢰.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앞세워 함부로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솔렛은 본질적으로 의무를 등한시할 수 없는 자였다. 그는 지금껏 그동안 고귀한 고독에 갇혀 살아왔다. 그 삶은 고귀했을지언정 결코 펄떡거리는 날것의 삶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저를 위해 지어 준 이름이자 안배한 삶이었고, 안락하고 평화로웠으나 결국 제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리고 이솔렛은 어릴 때부터 지독히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장난꾸러기였다.
그래서 박차고 일어나기로 한 것이다. 고귀하여 고립과도 같았던 고독을 깨고, 이제껏 몰랐던 폭풍 속으로.
그리고 그 길을 고독 대신 사랑으로, 또 믿음으로 감싸 줄 이가 바로 옆에 있었다. 이솔렛은 연인이자 동료이며 그가 가장 신뢰하는 전사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그리고 발걸음을 뗐다. 필멸의 땅은 이제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