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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ning

본래 아노마라드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았다. 따뜻한 남부와 중부의 사람들은 북쪽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몰랐으며, 가장 추운 날에도 이곳의 얼음이 어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12월 하순의 아노마라드에는 지금껏 이곳 사람들이 느껴보지 못한 추위가 몰려와 며칠이고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다.

넓은 도로에도, 비좁은 골목에도, 둥근 광장에도, 한적한 산책로에도 한바탕 눈이 내렸다. - 이따금 눈이 내리는 겨울날도 있었다지만, 이번에는 수준부터 다른 폭설이었다 – 그렇게 나흘 밤낮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눈이 그쳤으니, 그동안 사람들은 꼼짝없이 실내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눈은 그쳤다지만, 아노마라드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여전히 너무나도 추운 겨울이었다. 바닥에는 못다 치운 거뭇거뭇한 눈덩이의 흔적이 큼직하게 남았고, 거리의 상점들은 처마에 하나같이 두꺼운 고드름을 달고 있었다. 자꾸만 빨갛게 어는 코 때문에 울상인 사람들, 시린 손을 비비며 옆사람과 딱 붙어 걸어가는 사람들, 춥다며 우는 소리를 하다가도 이내 저들끼리 와르르 웃어버리고는 남은 눈을 찾아 밟으며 달리는 장난꾸러기 아이들....... 그나마도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994년 12월. 그야말로 아노마라드의 기록적인 추위였다.

아,

춥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추위.

 

지난 몇 년간 아노마라드에서 보낸 겨울은 보리스에게 큰 추위로 기억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0도를 웃도는 겨울 날씨는 트라바체스와 렘므, 그리고 어느 한 섬의 혹독한 추위를 겪은 그에겐 그리 춥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눈, 얼음, 고드름, 서리, 흰 입김은 물론이고, 눈보라와 같은 겨울 폭풍, 얼어붙은 호수, 빨갛게 언 손가락과 코끝까지. 전부 과거가 되어버린 어느 겨울날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것들.

그러나 이번 겨울은 달랐다.

 

“보리스! 얼른 와. 저 앞 식당이야.”

 

생각해보면, 나흘 내내 눈이 왔었지. 지난 며칠간 보리스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날의 풍경을 삐걱대는 닫힌 창 밖으로만 멍하니 바라봤다. 언뜻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날씨에 갑자기 밖에 나갔다간 세찬 바람에 휩쓸리다가 감기라도 된통 걸릴 것 같았기에 그저 지켜만 봤었다.

 

“보리스?”

 

창틀 위로 하얗게 부서져 내리던 눈송이. 그런 것들은 손바닥 위에 닿으면 잠깐의 차가움과 맞바꿔져 금세 사라져버린다.

 

“야, 숯가마 오늘 왜 저러냐? 좀 이상한데.”

“나도 몰라. 멀어서 잘 안 들리나?”

 

손끝 발끝 다 얼리는 차가운 공기는 또 어떻고. 추위는 실내의 온기에 익숙해진 맨살 위에 덧씌워져 순식간에 전신을 휘감는다. 그렇게 저릿한 감각 때문에 혹 팔다리를 잘못 가누더라도 늘 곁에서 붙잡아주던 사람이 있었고.......

 

“보리스!”

 

아.

 

“보리스! 뭐해, 얼른 들어와...... 으, 에취! 애들 다 기다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루시안이 저 멀리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미안, 짧게 대답하며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자 문에 기대어 선 막시민이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너도 딴생각에 정신 놓을 때가 있군그래.”

_

“란지에, 이것 봐! 오스틀리 교수님께서 책을 내셨어.”

“정말이네. 신간 코너에 뭔가 있을 거라 하시더니.”

“고대 유물의 수집과 보관에 관한 역사 파헤치기. 재밌겠다!”

“응.”

 

 식당에서 나와 한 블록을 되돌아 걸어가면 나오는 아늑한 ‘네냐플 이웃 서점’. 확실히 실내는 바깥보다 훨씬 따뜻했으므로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여섯 명은 서점 안으로 들어가 책을 사거나 구경했다.

 

“진짜, 연구실에서 유물 쪼가리 굴리는 게 일상인 쟤라면 몰라. 근데 너까지 그러냐?”

“뭐 어때서? 막시민 너도 하나 살래?”

“나 빌라에 이미 베개 많다.”

“책을 베개 취급......! 속상해!”

 

 란지에가 지켜보는 가운데 신간 코너 옆에서 가볍게 투닥거리는 티치엘과 막시민, 왼쪽 서가에서 뽑아 든 책을 살펴보다가 오류를 발견한 조슈아, 그 옆에서 반쯤 감탄한 얼굴로 키득대는 루시안.

보리스는 조용히 서점을 둘러보았다. 제법 많은 책장들, 그런 책장들을 빼곡이 채운 책들. 먼지가 느리게 떠다니는 차분한 공기. 책 향기와, 고요한 분위기와, 그 사이를 맴도는 적당한 소음.

보리스는 그런 배경들 위로, 찾아오는 자라고는 자신을 포함해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던 어느 장서관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역시나 약간 흐려졌던 기억이라는 느낌이 든다.

 고개를 돌려보니 삐죽 튀어나온 책이 몇 권 보였다. 손을 뻗어 책장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한 권씩 건드리고 있자 겨울날 홀로 집에서 책을 읽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창틀이 삐걱대며 흔들려도, 지붕 밑의 고드름이 이따금 퍽,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나도, 아무런 동요 없이 의자에 몸을 맡기고 커다란 책의 책장을 하나 둘 넘기던 이솔렛.

다시 생각에 잠긴 보리스의 눈동자가 잠시 그리움으로 일렁였다.

_

“아, 재밌었다! 날씨는 엄청 춥지만.”

“난 아직도 적응 안 된다. 으윽, 이러다가 얼어죽겠어.”

“에취! 슬슬 돌아갈까?”

“그러자.”

 

 사거리의 종탑이 밤 11시의 종을 울렸다. 녹다 만 눈으로 뒤덮인 종탑 꼭대기부터 뎅, 뎅, 뎅, 하고 퍼져가는 11번의 종소리. 여섯 명의 친구들은 작은 광장에서 여러 거리로 이어지는 길 위를 걷는다.

일찌감치 은은한 주황빛 조명으로 밝혀진 길가는 저녁때와 마찬가지로 한산한 편이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 역시 그리 많지 않다.

보리스는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면서도 잠시 멍해 있었다. 하나 둘 내딛는 발걸음에 맞춰 검푸른 머리카락도 찬바람에 가볍게 날렸다.

 

 오늘따라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자꾸만 불쑥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가라앉는 기억들 때문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갑작스런 이상기후가 돌연 그를 휘어잡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기분은 느껴지는 족족 조용히 눌러두기로, 한참 전에 정했던 것도 같은데.

일부러 고개를 한 번 저은 보리스는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하지만 시선을 들자마자 도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어설프게 스쳐갔던 기억들이 수십, 수백 가지의 장면으로 이어져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주 잠깐이지만 숨이 막혔다. 찰나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스쳐가는 한 장면 한 장면이 희게 빛났다. 때로는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었고, 때로는 강렬히 내리쬐는 직사광선이었다. 혹은 언덕 위를 뒤덮은 흰 풀꽃이거나, 하늘에 걸린 여러 겹의 구름들이거나, 그 사이로 날개를 펴는 흰 새들의 깃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작은 눈송이, 세찬 눈보라, 눈 쌓인 지붕, 얼음으로 뒤덮였던 세상. 그 모든 장면에는 흩날리는 금발, 그리고 한 줌 흰 머리칼이 있었다. 보리스는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짧은 금발의 여인이 곁을 지나간다.

 

“......이솔렛?”

 

 저도 모르게 물었다. 흔들리는 금발 사이로 언뜻 흰빛이 스쳤다.

_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네?”

 

 조금 당황한 듯한, 낯선 갈색 눈.

결국 목이 살짝 메이는 것을 느끼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잘못 봤군요. 미안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보리스는 천천히, 다시 걸어갔다. 소녀도 멀어져갔다.

친구들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보리스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들 사이에서 적당한 속도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묵묵히 걸었다.

 아무래도, 그리웠나 봐.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자꾸만 착각하는 걸 보면.

 유난히 추운 겨울. 정말 하필이면, 싶은 것들이 엮이고 엮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

 

 손목의 무명천.

 찬바람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손목에 찰싹 감겨버린 흰 천 조각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방금까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가장 잘 알려줄 조각인데도.

 

 결국에는 그냥 그리웠던 거다.

 자꾸만 비슷한 기억으로 뒤덮이니까. 현재 위에 희미하게 덧씌워진 과거가 그리워서. 그 기억 속에서 가장 빛나던 사람이 그리워서.

비슷한 풍경들, 그러나 이번에는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게. 그리워도 당장 달려갈 수 없다는 게, 유난히, 그렇게도 아쉬워서.

 그걸 이제야 다시금 깨닫는다.

 참 바보같게도.

 

 결국 보리스는 홀로 조용히 웃었다.

 그때까지도 나름 심각했던 몇몇은 이내 영문을 몰라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티치엘이 옆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는 물었다.

 

“보리스, 이제 괜찮은 거야?”

“뭐가?”

“그게, 아까부터 계속 표정 안 좋았잖아. 어디 아픈 건 아닌가 걱정했어!”

“아...... 미안.”

 

 그랬구나. 보리스는 작게 미소지었다.

 

“괜찮아.”

_

 관계는 점차 가까워지고, 굳어지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무너지다가 결국 한 가닥만 남기고 쓸려나갔다. 멀고 먼 저 너머의 섬까지 이어지는 외줄 같은 인연. 다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뻗어가는 외줄이다.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타인에 의해 끊기게 두지도 않겠다고, 오래 전 가장 연약한 마음 한 조각만을 남겨두고 올 때 약속했으므로. 그런 사이를 이어주는 또 한 명의 항해자가 있기에 온 바다를 밝게 하고, 또 한 마리의 새가 있기에 마음은 멀리 비행하여 도달한다.

 둘 사이에 오가는 침묵의 신호. 그것이 있기에 아무리 멀리, 오래 떨어져 있어도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혹 지금의 그처럼 갑작스레 기억 속으로 떠밀려 그리움의 바다에 잠기더라도.

 이솔렛, 당신이 저 대륙 너머 외딴 섬에 있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는 당장 만날 수 없죠. 아마 오랫동안 만날 수 없겠죠.

 잘 지내나요, 건강한가요. 당신도, 사제님도?

 이곳의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네요. 섬의 겨울도 여전하겠죠.

 ......사실 가끔, 아니 자주 이솔렛의 노래가 그리워질 때가 있어요. 당신과 함께 노래하던 날들이 그립고, 그런 날들이면 가끔 볼 수 있었던 당신의 미소가 그리워요.

 다만 내가 없어도 이솔렛, 당신이 여전했으면 좋겠어요. 제 욕심일까요?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죠. 사실은 당신도 나를 그리워헀으면 하는 마음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게는 당신의 행복이 소중하니까. 그래요, 이솔렛, 당신이 여전하길 바라요.

 

 보리스는 이런저런 말들을 그저 속으로만 삼켰다. 떠오르는 대로, 전부 접어 넣었다. 빌라로 돌아가면 어딘가에 모두 적어두겠노라 다짐했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떠올릴 때마다 그리워 힘들겠지만, 그래도 잊지 않을래요. 두고두고 되새길래요. 오늘처럼 당신을 떠올리지 않고는 못 배기던 날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아서, 꼭 언젠가 한꺼번에 전해주겠어요. 보고 싶었다고. 당신이 이렇게나 보고 싶었다고.

 결국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자 보리스의 미소도 조금 씁쓸해졌다.

- 사실 괜찮다는 건 별로 솔직하지 못한 말이었죠.

 

 만일 당신과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있는 힘껏...... 앞으로의 삶을 살겠어요. 당신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약속했으므로.

그렇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건 어떻게 하죠.

보고 싶어요, 이솔렛.

- 껌수 @DFD_0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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