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 특집, 스포츠 스타!
아마 엄마가 일요일 아침 8시에 일어난 나를 봤다면 "너 뭐 잘못 먹은 것 아니니?"하고 걱정부터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드디어 오늘, 보리스와 이솔렛이 아침 예능에 출연하기 때문이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니 매주 각 분야의 스타들을 모셔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난주가 아마도 배우 특집이었고, 이번 주는 스포츠 스타 특집이라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번 연도 올림픽 펜싱 금메달이었던 보리스가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뒤이어 옛날 피겨 유망주로 꼽혔던 이솔렛의 출연 소식도 전해졌다. 뜬금없는 출연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글쎄, 지난번 관찰 예능에서 그렇게 시청률 최고치를 찍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덕후 필터를 빼고 봐도 당연히 초청할 만하지 않나?
' 그' 예능 하면 또 말할 게 많아지는데, 일단 TV부터 켜고 주방에 다녀올까. 간단한 아침으로는 시리얼에 만 우유…. 어제 늦게까지 내일 예능이 어떨지 SNS로 얘기했던 터라 졸려서 입맛이 없다. 어, 그런데…. 시간 계산을 잘못했는지 벌써 방송이 시작하려고 했다.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볼 생각도 못 한 채 TV에 무섭게 집중했다. 어디지?! 어딨는 거야! 아니 왜 자리 배치를 저렇게 했대? 제작진 양심 어디로 갔어?
TV를 켜자마자 방송이 시작되어 당황했을 뿐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둘을 바로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 아니다. 이솔렛은 좀 어려웠다. 보리스는 패널들 왼쪽 앞줄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이솔렛은 보리스 뒤쪽 대각선, 즉 MC와 가장 먼 자리…. MC가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사이 SNS에 들어가서 글을 보니 모두 한 마음으로 불만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제작진 오래 사시겠네…. 이렇게 글 올라오는 속도가 빠른 게 얼마 만이었더라? 3개월 만이었던가? 착즙에 도가 튼 보리솔렛 팬덤이었지만(굳이 따지자면 보리솔렛 팬덤이라기보다는 보리스 팬덤과 이솔렛 팬덤이 동맹을 맺은 것에 가깝다) 보리스의 수상 소식을 제외하면 둘 다 언론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손을 바삐 움직여 스크롤을 내리면서도 가끔 TV를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솔렛입니다."
약간 허스키한 미성을 내가 놓칠 리 없었다. 카메라는 이솔렛의 얼굴을 크게 비춰주더니 금방 전체 패널을 화면에 담았다. 이솔렛의 얼굴이 금방 지나간 건 아쉬웠지만, 자기소개를 들은 직후 보리스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분명 속으로는 이솔렛을 생각하겠지!! 이솔렛과 MC가 나누는 근황 토크에 초집중하면서도 내 머릿속 회로는 불이 날 정도로 돌아갔다(불건전한 내용은 아니었으니 오해는 금물이다!).
"지난번에 다른 예능에 나오셨을 때는 노래방에 이솔렛 씨가 아는 노래가 없어서 정말 아쉽게도 노래 실력이 어떤지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이번에는 노래를 하나 배워오셨다고요?"
"네, 여기 앞에 있는 보리스가 방송이 끝난 뒤에 몇 곡 가르쳐 줬거든요. 평소엔 제가 보리스에게 노래를 가르쳐줬는데 이번에는 제가 배웠네요. 조금 이따 기회가 있다면 들려드릴게요."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지? 귀를 의심하는 사이 MC는 다른 패널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TV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몇십번은 봤을 듯한 지난 예능의 내용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때가… 올림픽이 끝난 후 좀 지나서였나. 방송국에서 올해의 대스타 보리스의 일상을 담은 관찰 예능을 방영한다고 대대적인 광고를 했었다. 당시 방영 전에는 분명 밥 먹고 트레이닝만 하는 무미건조한 내용일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역시 까보기 전에는 모르기 마련이지. 무뚝뚝하고 잘 웃지도 않는다던 동료들의 증언과는 다르게, 농담에 장난에 기타 등등…. 아무튼, 반전매력이 가득한 화였다. 물론 장난치고 편하게 대하는 대상은 단둘뿐! 바로 나우플리온 씨와 이솔렛이었다.
나우플리온 씨야 보리스를 청소년기 때부터 발굴해내 세계적인 선수로 길러낸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이솔렛의 출연은 퍽 의외였다. 그도 그럴 게 이솔렛과 보리스의 공식적인 접점은 어릴 때 같은 시골 동네에 살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방송 이전에도 둘이 친했다는 카더라가 돌았지만, 둘의 주 종목도 다른 데다 그 소문이란 게 하나같이 다 신뢰성 없는 것뿐이었다. 예를 들어 이솔렛이 보리스의 노래 선생이었다는 소문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정작 보리스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아무도 목격한 적이 없어 오히려 이 소문 이후 보리스는 음치라는 추측이 반쯤 정설인 것처럼 돈 적도 있었다.
게다가 한창 상을 휩쓸던 시기에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은퇴한 이솔렛은 그 후 한 번도 소식을 알려오지 않고 은둔했던 터라 더 뜻밖의 출연이었다. 그 당시 떠오르던 아역 배우 리리오페와 얽혀서 그랬다는 썰을 입덕 후에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서 찾긴 했는데, 리리오페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결국 진실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리리오페의 소속사가 꽤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이려나, 이거.
언제 이렇게 얘기가 멀리 왔지…. 하여튼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던 내용이다 이거였다. 특히 보리스와 이솔렛, 나우플리온 씨가 노래방을 간 부분이 킬링 포인트였다. 노래방을 온 것이 처음인 데다 대부분의 가요를 몰랐던 이솔렛 대신 나우플리온 씨의 음정 박자 무시한 열창이 이어지다가, 결국 깜찍한 보리스의 동요로 마무리를... 안 본 사람한테는 농담 같이 들리지? 하지만 100퍼센트 사실인걸! 어디서 한잔 걸치고 오기라도 한 듯 나이를 잊고 폭주하는 나우플리온 씨에게 말려든 보리스, 옆에서 당황하다가 다람쥐 동요를 부르라고 은근슬쩍 부추기는 이솔렛이 포인트였다.
이렇게 얘기하면 개그만 가득하지 않나 싶지만, 엄연히 둘 사이에 달달한 기류가 흘렀다 이 말씀! 반찬도 가져다주고, 같이 장도 보러 나가며 서로가 서로의 일상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다정한 분위기를 보여줬던 둘은 실시간 검색어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정도로 이슈가 되었다. 나도 이때 입덕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둘은 그렇게 보리솔렛 지지자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놓고 다시는 방송에 얼굴을 같이 비추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 토크쇼 출연이 우리에게 단비 같을 수밖에.
방송은 그 뒤로도 물 흐르듯 진행됐다. 어찌나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솔렛이 말해주는 공백기 동안의 일상과 보리스가 말하는 올림픽 때 있었던 에피소드까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워들을 수 있었지만, 덕후 마음이 다 그렇듯 아무리 들어도 더 듣지 못해 아쉬운 법이었다. 슬슬 방송이 끝나갈 때가 되자, MC가 이솔렛에게 아까 했던 얘기를 상기시켰다.
"슬슬 끝날 때가 되니 참 아쉽네요~. 이솔렛 씨, 아까 했던 얘기대로 노래 한 곡 청할 수 있을까요? 방송 마지막을 이솔렛 씨의 노래로 장식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이솔렛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줄에 앉은 다른 출연자가 자리를 바꿔주어서 마이크를 든 이솔렛의 모습이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클로즈업됐다. 이솔렛 옆자리에 앉은 보리스의 머리 끝자락이 언뜻언뜻 화면에 잡혔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다
"어떤 곡을 부르시려고요?"
"김X국의 '사랑스러워' 부르겠습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선곡을 하는 게 역시 이솔렛 언니답다고 해야 할까…? MC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진심이 가득 담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오늘의 마지막 멘트를 외쳤다.
"네, 이솔렛 씨가 부릅니다, 김X국 씨의 '사랑스러워'! 시청자 여러분 모두 즐거운 일요일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세상이 힘들어도 널 보면
마음에 바람이 통해
이솔렛의 노래는 첫 소절을 듣자마자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출연자들과 방청객들 모두가 놀란 것이 TV로 보는 나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지난번 사랑처럼 울까 봐
한참을 망설였지만
보채지 않고 나를 기다려 준 너
편안하게 스며들어와
아, 방금 노래를 부르면서 보리스 쪽에 시선이 갔다고 생각한 건 나뿐인가…? 이렇게 다른 데로 생각이 빠졌다가 바로 다음 소절을 듣고 생각이 뚝 끊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워
네가 나의 여자라는 게 자랑스러워
장난스럽게 남자로 바꿔 불러 주셨어도 좋았을 텐데. 물론 보리스, 나우플리온, 이솔렛 이렇게 셋만 같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이솔렛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좋았다. 보리솔렛이 꼭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나는 이솔렛의 열성 팬이기도 하니까! 방금 정말 설렜었다. 나는 이솔렛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몸을 좌우로 흔들며 노래를 감상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세상 끝날 때까지
나에게만 사랑스럽기
노래가 끝나고 방송이 종료되면 아쉽기만 할 것 같았는데, 마지막으로 잡힌 화면에서는 보리스가 옆에서 끝 소절을 같이 립싱크하는 것이 보였다. 응, 난 이제 죽어도 좋아…. 오늘 저녁엔 절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
방송이 전파를 탄 날 밤, 보리스의 친구 루시안이 인스타 라이브로 보리스와 이솔렛이 낀 회식 자리를 비췄다. 이솔렛은 영상이 찍히고 있는 걸 알아서 슬쩍 사각지대로 몸을 피했지만, 살짝 술기운이 오른 보리스는 그대로 영상에 나왔다.
"보리스, 너도 한 번 '사랑스러워' 불러보지 않을래? 듣고 싶어!"
"난 별로…."
"아 왜~! 이솔렛 씨도 부르셨잖아!"
"내가 어떻게 이솔렛을 너라고 불러…."
우리 연애한다고 크게 공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에 자리의 모두가 당황한 듯했다. 루시안이 든 스마트폰이 흔들리면서 비춘 이솔렛도 미미하지만 확실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이브는 그대로 황급히 종료되었다. 다음날 자신이 어떤 소리를 한 것인지 자각한 보리스와 이솔렛 사이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