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sh Upon Me
"보시다시피 빈 테이블이 없어서...저기 바 석에 한 분은 앉으실 수 있겠는데."
"어떡하지?"
루시안은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다른 식당들에서도 이미 만석이라고 쫓겨났고, 여기가 마지막으로 들어와본 식당이었다.
"대낮부터 무슨 식당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돈이 있는데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니! "
돈이 얼마나 있는지, 또 얼마나 쓸 용의가 있는지에 따라 테이블의 누군가를 쫓아내서라도 자리 마련이 가능하긴 할 것이라고 보리스는 생각했지만 루시안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진 않는 모양이었다. 굳이 일깨워주고 싶진 않았다.
"저기 저 분...혼자이신 것 같은데 혹시 부탁해보면 안 되려나?"
티치엘이 가리킨 쪽에 4인석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자가 보였다.
실내인데도 두건을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덩치가 크지는 않았다. 옆자리에 짐을 두고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무기일 수도 있을 법한 크기의 꾸러미도 보였다.
"티치엘, 네가 한번 부탁 해볼래?"
상대가 평온하게 식사 중이라는 점, 체격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 무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장소가 협소해 빠르게 공격자세를 취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 만일의 돌발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신이 위치나 자세가 유리하다는 점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점검한 보리스가 안전하다는 판단에 티치엘을 앞세웠다. 뭔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땐 보리스의 위압감보다는 티치엘의 상냥한 미소가 훨씬 사람의 마음을 얻기 쉬웠다.
"안녕하세요. 저기, 식사 중에 정말 죄송하지만...혹시 자리를 저 쪽 바 석으로 바꿔 주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저희가 세명인데, 자리가 없어서요. 혹시 바꿔주실 수 있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방긋방긋 웃으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묻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왜."
깨진 질그릇 같이 투박하고도 거친 목소리였다.
"아...그게, 다른 식당도 가보았는데 자리가 없었거든요. 잘못하면 점심을 굶게 될지도 몰라요...어떻게, 안될까요?"
"돈이라면 있어! 그 식사, 우리가 계산할게!"
끼어든 루시안을 티치엘이 팔꿈치로 쿡 찌르며 반말을 하면 어떡해! 속삭였고 루시안은 왜, 저 쪽도 반말이잖아! 하며 작게 맞받아쳤다.
"여자애는 부탁을 하고, 남자애는 돈을 준대고...흠. 거기 시꺼먼 남자애, 그 쪽은 뭐 할 말 없나?"
남자애, 라고 불린 것이 낯설어서 보리스가 흠칫 했다. 탁하고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기보다 제법 나이가 많은 것일까. 보리스의 체격이나 얼굴 골격 어느 것을 보더라도 완연한 성인 남자로 보일 터였다.
"자리를 바꿔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보리스가 정중하게 부탁했다.
"아니면, 합석을 허락해주신다면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먹고 일어나겠습니다."
"합석이라...재밌네. 뭐, 심심하긴 했지."
사실 합석은 내키지 않았지만 오늘도 육포로 때운다고 하면 루시안은 정말로 울어버릴지도 몰랐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비싸고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배 터지게 먹어줄 거라며 어제부터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좋아, 그럼. 무릎 꿇고 부탁해봐."
"...예?"
너무 뜬금이 없어서 보리스는 귀를 의심했다.
"무릎 꿇고 합석하게 해주십시오, 하면 합석하게 해줄게."
뭐 이딴 사람이 다 있어.
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보리스가 휙 몸을 돌렸다.
"가자."
"엥, 그치만..."
"토끼라도 잡아줄 테니까 나가자."
"무릎 꿇기가 그렇게 힘들어? 거 되게 비싼 무릎인가 보네."
빈정대는 목소리에 보리스가 차갑게 받아쳤다.
"초면에 이유 없이 억지부리는 자에게 내줄 만큼 가치 없진 않지."
"그럼 초면이 아니면 괜찮은 건가?"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 섞인 목소리에 거침없이 식당 문을 향하던 보리스는 발에 못이 박힌 듯 우뚝 섰다.
"어? 목소리가..."
루시안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 기분 나쁘게 깨지는 신경을 긁는 목소리였던 것이 단단하면서 풍부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로 바뀌었다. 갑자기 마른 땅에 풀이 돋더니 순식간에 꽃이 만발하는 기적을 목도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루시안은 이런 신비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보리스는 황급히 몸을 돌려 거의 뛰듯이 성큼성큼 걸었다.
"당신...!"
"놀려서 미안해.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
두건을 휙 벗자 짧은 금발을 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살짝 상기된 표정의 그가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굳어 있는 장신의 남자를 올려다보면서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키 컸네?"
“여기 식사 3인분 주세요! 아, 그리고 지금 고기 메뉴 뭐 돼요?”
“아, 여기 토끼 괜찮던데요, 아까 먹어보니.”
입에 기름칠할 생각에 잔뜩 들뜬 루시안에게 이솔렛이 슬쩍 일렀다.
“그럼 토끼고기 주세요! 아 근데 닭고기 먹고 싶었는데…음 그냥 닭고기도 주세요!”
“그…”
메뉴가 뭐로 정해지든 말든, 보리스는 줄곧 이솔렛과 탁자만 번갈아 바라보며 뭐라 말을 꺼내려다 말고 다시 입술만 핥았다. 방금 전에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으스러지게 꽉 껴안아 놓고서는,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는 줄곧 어쩔 줄 모르고 좌불안석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겠지.
“그게…”
이 자리에서 물어도 되나, 입에 담아도 되나. 주저주저 하면서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차마 입밖으로 꺼내 묻지도 못하는 질문에 대답해주려고 이솔렛이 씨익 웃어보였다. 보리스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퍼억!
“아야!”
이솔렛이 갑자기 주먹을 뻗어 맞은 편 보리스의 팔을 때리고, 제법 큰 소리까지 나자 깜짝 놀란 티치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좀 전해달라셔서.”
“아니, 대체 왜…”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라던데.”
“와, 어이 없네요. 죄는 무슨 죄야? 다 할 만 하니까 한 거지…”
멍이 들만큼 세게 맞은 팔을 문지르면서도 보리스는 연신 싱글벙글 했다.
“아, 설마 무릎 꿇는 것도 그렇게 시키랬어요? 그 인간이?”
“아니. 그건 그냥 내가…그 이야기 들었을 때부터 나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딱 왔지 뭐야. 그래도 나는 그 분만큼 지독한 건 아니었지?”
세상에, 그 이야기까지 했단 말이야? 대체 또 어떤 할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다 늘어놓은 거야?
눈앞에 있었으면 자신이야 말로 한 대 때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보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끝에도 못 미쳤죠. 그땐 진짜...어후. 제가 그렇게 어리고 작지 않았으면 못 참고 한 대 치지 않았을까 싶네요. 대체 어디서 그렇게 욕을 배워온 건지.”
“후후, 나도 배우고 싶다. 욕 잘하는 법.”
“그런 걸 배워서 뭐하게요?”
“뭐든 잘 하면 좋은 것 아니겠어?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고 싶을 때 유용하겠지.”
“아까 보니까 제법 소질이 보이시던데.”
“전혀, 네가 별로 모욕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던데. 이 미친 놈은 뭐지, 하고 경멸할 뿐.”
“좀...밑도 끝도 없긴 했어요. 개연성도 약하고,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이래도 넌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고 조롱하는 느낌이 부족했죠.”
“역시 성격에 안 맞아.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느니 베어버리는 게 편할 것 같네. 아, 어서 먹어요, 배고플 텐데.”
“아, 저, 티치엘 쥬스피앙입니다! 보리스 학원 친구예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가 제 앞에 놓이고도 먹지 못하고 기다리는 것을 보고 이솔렛이 권하자 드디어 제 소개를 할 타이밍을 잡은 티치엘이 우렁차게 외쳤다. 이솔렛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간단한 소개로 답했다.
“이솔렛이에요.”
우리끼리만 대화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걸까, 언뜻 떠올린 이솔렛이 그러나 도무지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아 그냥 넘겼다. 그러기엔 너무 오래, 너무도 지독하게 그리던 이였다.
다행히 티치엘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숙제처럼 자기소개를 마치고는 곧 포크와 나이프를 양 손에 들고 루시안과 마찬가지로 전투적으로 음식을 입에 투하하는 일에 열중했다. 몇 입 넘기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질문할 여유를 찾은 듯했다.
“근데 보리스랑은 많이 친한 사이이신가 봐요. 사실 보리스가 저렇게 얘기하는 거 처음 봤거든요.”
“저 누나 보리스랑 완전 친해! 실버스컬 때도 같이 있었는 걸. 누나, 저는 기억하시죠?”
“내 …인이야…”
보리스가 낮게 웅얼거렸다.
“응?”
알아듣지 못한 티치엘이 되묻자 보리스가 입안의 음식을 한꺼번에 꿀꺽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연인…이야. 이솔렛.”
그 말을 왜 옆에 앉은 티치엘이 아니라 마주 앉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하는지. 술 한 모금 안 마신 주제에 얼굴은 왜 저렇게 새빨개져 있는지. 포크를 쥔 손은 왜 덜덜 떨리고 있는지. 저렇게 물음표를 띄운 눈으로 애절하게 바라볼 거면 뭣하러 단정문으로 말을 한 건지. 대체 얘는 박력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솔렛은 주변에 사람들만 없었으면 눈앞의 소년을 깨물어 먹어 치워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스스로에게도 다소 낯선 생각을 하며 간신히 품위를 유지하고 웃었다.
“응, 보리스의 연인이에요.”
우연만으로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우연히 대륙에 잠시 나온 이솔렛과 동선이 겹쳤고, 우연히 그 도시에서는 오늘 저녁 축제가 열리고(대낮부터 모든 식당이 만석인 데는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연히 같은 식당에서 만나, 축제는 연인끼리 즐기는 것이라며 루시안을 데리고 사라져준 티치엘 덕에 계획에도 없던 데이트를 즐기는 중이라고?
보리스는 이 상황이 믿기질 않아 몇 번이고 이솔렛에게 물었으나 이솔렛은 글쎄 우연이 아니라면 필연이겠지, 하는 알쏭달쏭한 답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그보다 저기, 저건 또 뭐지? 대단한 냄새를 풍기는데.
"맛있어요?"
보리스의 웃음 섞인 질문에 이솔렛은 입 안 가득 찬 음식을 삼키고 대답하려는 듯 빠르게 우물댔다. 볼이 튀어나올 정도로 음식을 우겨 넣은 모습은 처음 보는 지라 생경하고 귀여웠다.
"천천히 먹어요, 천천히."
"맛있네."
이솔렛이 입 안에 음식이 꽉 차도록 밀어 넣은 것은 식탐 때문은 아니었다.
손에 들린 것은 고기와 야채를 꼬치에 꿰어 입으로 빼먹도록 한 음식이었는데 고기 두 덩이가 한꺼번에 딸려 나오는 바람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입에 날름 밀어 넣었던 것이다. 이솔렛은 손에 든 나무 꼬치를 유심히 관찰하다 말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아니, 우린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
"섬에선 들고 다니며 먹을 일이 없으니까요.
"그러게. 대륙 사람들은 참 성급해. 조심해."
성급한 대륙인이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돌진해오자 이솔렛은 보리스가 부딪히지 않도록 손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먹으면서 걷거나, 주머니를 뒤지며 뛰거나. 한번에 하나씩 하는 사람이 없네. 다들 이렇게 정신없이 사는데 부딪히지 않는 게 신기한걸."
"부딪히지 않는 건 아닐 걸요."
보리스는 자신의 손목에 감겼다가 떨어져 나가는 이솔렛의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방금 슬쩍 손등을 다시 부딪힌 게 너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무래도 좀 너무 정신이 없나요?"
손을 잡아도 되는걸까.
안될 것도 없는데, 타이밍을 놓친 것 같기도 하고.
"정신없긴 한데, 맘에 들어. 다들 바쁘게도 사는구나. 가만히 앉아 먹을 시간도 아까울 만큼. 그런 게 재밌어."
산 위의 공주님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사제가 되기 전부터도 사제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더랬다. 고고하게 홀로 지내는 것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분위기. 그런 삶 또한 스스로 선택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외로움을 아예 느끼지 않을 리는 없다. 이런 호기심 어린 시선과 상기된 뺨을 볼 때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저기 음악 소리가 들리는데? 가 보자."
덥석. 이솔렛이 아까부터 손가락만 슬쩍슬쩍 스치던 보리스의 손을 잡았다.
널찍한 광장 한가운데 모닥불을 아주 크게 피워 놓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 즈음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선선한 공기를 춤추는 사람들의 열기가 서서히 데워갔다. 타오르는 노을과 어른거리는 불빛에 이솔렛의 얼굴이 발갛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뭐야, 그냥 막 춤을 추는 건가? 무슨 종교 의식 같은 건 아니겠지?"
"아닐 걸요. 그냥 축제니까, 신나서 추는 걸 거예요."
"응, 그런 것 같긴 했어. 별 규칙은 없어 보여서."
덩실덩실, 빙글빙글. 젊은 남녀가, 오빠와 여동생이, 중년 여인 둘이서, 남성 혼자서. 각자 되는대로 킬킬대며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도 출까?"
"이솔렛, 춤 출 줄 알아요?"
"몰라! 춰본 적이 없어서."
이솔렛이 경쾌하게 외치며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보리스라고 춰 본 적이 있을 리 없었다. 벨노어성에서 사교댄스의 기본을 배운 적은 있었지만 이런 곳에 어울리는 춤인 것 같지는 않았다.
춤을 못 춘다고 한 것이 무색하도록, 이솔렛은 주변을 흘깃흘깃 살피더니 이내 자연스레 분위기에 녹아 들었다. 박자에 맞추어 이 발 저 발로 무게중심을 옮겨보다가 위아래로 반동을 주었다. 그런 스스로가 우스운지 키득거리다가 점차 동작이 과감해지더니, 이내 가볍게 땅을 박차고 빙그르르 돌았다. 주변에서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보리스는 따라서 어색하게 몸을 움직여보다가 이내 그 마저도 포기한 채 그저 넋을 놓고 이솔렛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음 가는 대로 춤을 추기 시작하자 이 많은 사람들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이솔렛 혼자만의 독무대가 마련된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움직임은 날렵한 동시에 묵직했다. 독특한 발놀림이 그녀의 검술과 닮아 있다는 것은 꽤 오래 지켜본 후에야 깨달았다. 그녀의 검술을 이런 환경, 이런 분위기에서 지켜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닥불에서 나는 연기 때문일까. 어쩐지 눈이 매워와 보리스는 눈을 급하게 깜빡였다.
"말뚝처럼 서서는 뭐하고 있어."
기분 좋을 정도로 숨이 차 보이는 이솔렛이 다가와 보리스의 양손을 잡았다.
"춤 안 춰?"
"잘 못 추는 걸요."
"그냥 되는대로 추면 되잖아."
"되는대로 몸이 움직이질 않는데 어떡해요. 모두가 당신처럼 모든 걸 잘 하는 건 아니라고요."
여간해선 듣기 힘든 보리스의 투정 섞인 목소리에 이솔렛이 웃었다.
"나라고 다 잘 하는 건 아닌데. 귀족 집에서 지냈다며. 춤 정도는 배우지 않았어?"
"그야 배우긴 했지만..."
"그럼 가르쳐줘."
이솔렛이 빳빳이 서서 양손을 들어보였다.
"배운 대로는 잘 하잖아, 너. 성실한 학생이니까."
"그거 칭찬인가요? 배운 것 이상은 못한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보리스가 이솔렛의 왼손을 조심스레 잡아 끌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리고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치고 왼손으로 이솔렛의 오른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솔직히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타입은 아니었지. 그래도 가르친 하나도 못하는 멍청이들보단 나아. 봐, 지금도 자세 그럴 듯 하잖아. 제대로 배웠네."
"아무리 멍청이라도 시작 자세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취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죠."
칼을 뽑는 것도, 춤의 시작 자세를 잡는 것도 교본에 나오는 그림 같이 완벽하게 할 줄 아는 시종의 끝없는 인내심이 빚어낸 자세였다. 처음에는 란지에가 그보다 키가 컸기에 보리스가 남성의, 란지에가 여성의 역할로 자세를 잡았을 때 구도가 잘 안 나오기는 했지만.
“근데 춤은 정말로 기본적인 것 밖에 못 배웠어요. 그나마도 잘 기억 안나서, 가르칠 입장은 아닌데..."
"알았으니까 그냥 해봐. 너는 너무 조심스러워. 좀 못하면 어때."
"그러는 이솔렛 당신은 뭘 못해서 부끄러워본 적 없죠? 오른발부터요. 오른발 뒤로, 왼쪽 딛고, 모으고. 뒤, 왼쪽, 모으고."
처음 배우는 사람과 그다지 자신 없는 사람 둘이서 엉거주춤 애매하게 붙어서 움직이자니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이솔렛이 보리스의 발을 밟고 미안, 내뱉었다. 보리스가 이솔렛의 발을 밟을 뻔하다가 급히 틀면서 균형을 잃자 이솔렛이 엉겹결에 멱살 잡듯 붙잡았다.
“미, 풉, 미안."
갑자기 멱살잡힌 보리스의 황망한 표정이 웃겨서 웃음이 터졌는데 그만 얼굴에 침이 튀어버렸다.
"아니, 큭, 그게...푸하하,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알지?"
이솔렛이 급하게 손으로 보리스의 뺨을 문질렀다. 보리스의 얼굴은 문지르기도 전에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귀엽잖아, 정말.
"…보리스?"
갑자기, 정말 느닷없이 갑자기 보리스의 표정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낀 이솔렛이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보리스가 곧바로 다시 웃어 보였으나 이솔렛은 그냥 넘어가는 성격은 아니었다.
"왜, 뭔가 있어?"
침 좀 튀었다고 기분 상하는 성격은 아니고. 간만에 들떠서 축제를 즐기던 애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면 혹시 뭔가의 위험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일까 싶었다. 비록 이솔렛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정말 아무 일 없어요. 진짜로."
"그럼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뇨. 진짜 별 거 아닌데, 신경 쓰게 만든 게 괜히 미안해지네요."
"그럼 말해봐. 별거 아닌 거 알고 신경 끄게."
“음,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는데..."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도 안 우습게 전달할 재주가 있을 것 같이 생긴 청년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너무 행복해서...두려워졌어요, 순간."
이솔렛은 웃지도 말을 끊지도 않고 진지하게 들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벅찬 기분이 들어서. 아,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뭐,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보리스의 얼굴은 웃음기가 없이 건조했다.
"그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면서, 함부로 바라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저는 소원을 조심해야 하거든요.”
무표정한 얼굴에 날카로운 각이 져 차갑고 단단한 조각상같이 느껴졌다.
“감당하지 못할 것을 바라지 않도록. 바라는 것이…바라지 않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어느덧 해는 완전히 지고 검푸른 머리와 청회색 눈이 어둠에 녹아들었다.
아름다웠다.
마치 고색창연한 예술품을 보는 것처럼...
"이제 웃으면 돼?"
이솔렛이 양손을 뻗어 보리스의 뺨을 부여잡고 가까이 잡아당기며 씩 웃었다. 으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보리스의 허리가 약간 숙여졌다.
이거 봐. 평범한 남자애잖아.
제아무리 많은 일을 겪었고, 전설 속의 외로운 영웅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희한하고 위험한 검을 짊어지고 있다고 해도. 손을 뻗으면 만져지는 뺨은 말랑하고 따뜻할 뿐이었다.
"보리스."
시야에 가득 찬 그의 얼굴은 당황과 수줍음으로 얼룩져 아까와 같은 무표정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이솔렛은 지금의 얼굴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네 행복이, 네 소원이 고작 이런 거라면, 그건 내게 걸어도 돼."
한 마디, 한 마디. 단단한 얼음조각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녹이듯이 이솔렛은 꼭꼭 눌러 말했다.
"오늘 뭐 했더라? 축제라고 돌아다니고, 팔찌 사고, 사람들 구경하고. 꼬치 먹고. 같이 엉성하게 춤 추고."
그리고 보리스는 내내 단 한번도, 이솔렛에게 언제 떠나야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왜 나왔는지. 어떻게 나왔는지.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 졸라 보았자 안될 것을 알고 미리 체념해버린 아이처럼, 아니, 자신이 혹시라도 조르게 될까봐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이 정도는 마음껏 바라도 돼. 내가 이루어 줄 테니까. 네 소원을 위해 검이 어떤 짓도 할 필요도 없도록. 그러니까…"
조금 더 욕망해도 돼.
너는, 우리는 살아 있잖아.
"키스...해도 돼요?"
꿀꺽. 그냥 줄곧 하던 것처럼 자연스레 침을 삼킨 것뿐이었는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솔렛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거봐. 이런 걸 네 검이 무슨 수로 들어줘."




